'살갗 아래 푸른, 무엇도 아니면서'
자기 언어를 찾아나가는 과정_이관훈 (프로젝트 스페이스 사루비아 큐레이터)
‘말(言)의 뒷면’, ‘낮은 물음’, ‘아무도 아닌 그림’, ‘아무도 아닌 그림, 되찾는 시간’…. 박명미가 지난 10여 년간 작업해 오며 개인전 때마다 전시 제목으로 쓴 문구들이다. 이 의미와 전시의 결과물은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그녀가 오랫동안 힘들게 지탱해 온 일상의 흔적(폐가, 시든 꽃과 잎, 죽은 풀과 나무, 도시 속 숲과 밤 산책길 등)이나, 간접 경험한 사회적 사건들(세월호 참사, 제주 4.3 참사, 용산 참사 등)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그림의 환영이 존재하기 이전, 그 흔적과 사건은 작업의 주된 요소로 쓰이고, 따라서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존재들(권력이나 자본의 이기에 의해 사라지거나 버려지는 것들)은 작가의 영적인 감각에 의해 소환되고 다른 환영 물로써 자리한다. 시대적 운명인지는 몰라도, 자본과 권력의 이기로부터 생길 수밖에 없는 사회적 상처와 결핍은 곧 개인의 삶으로 이어지고, 이를 직·간접으로 겪은 작가는 삶이 곧 예술로 이어지는 것을 몸소 체험한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체험은 불합리한 사회 및 개인의 환경 속에서 내재한 저항과 억압이 이미지와 언어 속에 그대로 표현되거나, 역으로 이미지와 언어 속에 있는 불완전성이 곧바로 외부 세계로 연결되어 타인들과 교감을 불러일으킨다.
그러한 표현의 맥락이 이번 전시 <살갗 아래 푸른, 무엇도 아니면서>에서도 이어지며, 전시 구성의 요소인 ‘엄마-되기’, ‘아기-되기’, ‘남편-되기’, ‘풍경-되기’ 등 4가지 콘텐츠는 더욱 내밀한 개인의 자의식을 건드렸다. 박수근미술관 창작스튜디오에서 시작한 이 프로젝트는 먼저 현재의 거주지인 춘천 지역과 작업실인 양구 지역을 자주 오가며 스치는 자연의 풍경들에서 시작한다. 작가에게 이 풍경들은 예전의 기억과 겹쳐 하나의 잔상으로 남겨지고 나머지 작업 요소와 연결하는 기본 모토가 된다. 그 시발점이 된 것이 지금은 사라진 박수근 정림리 갤러리에서 첫 번째 개인전(‘말의 뒷면’, 2011)을 진행했던 ‘소원 프로젝트’이다. 여기서 그 당시 갤러리 주변에서 발견된 오브제를 작업화한 것과 불완전한 언어의 소통방식에 질문을 던지는 프로젝트(갤러리에 관람 목적으로 들어오는 익명의 일반인들에게 너의 소원이 무엇인지 묻고 답하여 종이에 기록하는 방식)가 작업단서가 되었다. 작가는 삶과 예술을 13년간 교차하며 거듭난 이 시점에서 그때의 기억을 소환하여 현실 사회에서 말이나 언어가 권력화되어 왜곡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확인한다. 그래서 그 말과 언어로 표현할 수도 없고 자신의 언어를 찾기 위한 시도로서, 타인이 아닌 자신과 밀접한 관계인 엄마, 아기, 남편 그리고 아무것도 아닌 사물 등에 회화와 드로잉, 오브제, 소리, 퍼포먼스 등의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구현했다.
<엄마-되기>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드리는 마음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어느 날 어머니가 화려한 꽃무늬 옷을 입고 우연히 꽃나무를 바라보는 뒷모습을 연상하게 되면서, 평소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않았던 어머니의 꿈과 생각이 궁금해져 그녀로 되어보는 시선과 마음으로 그린 것이다. 그래서 같은 장면의 뒷모습을 시간을 달리하며 5개로 그린 연작인 ‘엄마 뒷모습’을, 길에서 주운 낙엽을 작업실에 두고 자연스레 메말라가는 과정과 햇빛이 낙엽에 뚫린 구멍 사이로 들어오며 빛나는 아름다운 순간을 그린 ‘잎달’을, 양구 지역에서 발견한 빨랫줄에 걸린 이불의 별 모양을 연상한 ‘별살솜’등을 그렸다. <아기-되기>는 어머니가 작가 자신의 아기를 업고 있는 상황에서 어느 순간 아기의 옹알이가 노래와 시처럼 들리는 신기함에 영감을 받아, 그 옹알이를 녹음해 음성 텍스트로 변환(1)하여 문자와 소리 그리고 퍼포먼스로 표현한 것이다. ‘선구의 노래 1’은 어머니가 입었던 그 화려한 문양을 천위에 프린트한 것과 그 변환된 텍스트를 아기 기저귀 천에 자수로 새긴 것(자음을 뺀 모음)을 위아래로 짜깁기하였고, ‘선구의 노래 2’는 그 변환된 텍스트를 전시 공간의 벽면을 흐름에 따라 변주하여 표기하였다. 또한, 퍼포먼스는 오프닝 행사로 이뤄졌다. 전시장에서 선구의 옹알이는 칼림바 연주자(2)에 의해 즉흥 음이 흘러나오고, 이 연주의 리듬에 따라 퍼포머(3)는 즉흥적인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남편의 존재를 찾아가는 시도로서의 <남편-되기>는 북한산에 함께 오르내리는 장면을 2013년부터 그린 것을 지우고 그리기를 반복한 그림(‘춤을 추려는 사람’, ‘숲에서 사라진 사람’)과 남편이 쓴 글 자체를 그대로 필사하며 그 영혼에 다가가 보려는 노력의 흔적을 시각화한 것(‘춤을 추려는 사람의 소원’)이다. <풍경-되기>는 생각 없이 걷거나 산책하며 길거리에서 우연히 발견한 여러 사물을 사유하며 조그마한 오브제를 입체 풍경으로 보여주고, 어떤 공간에서 발견한 흔적과 스치는 풍경들의 잔상을 또 다른 풍경(‘흔적 산수 1, 2, 3’, ‘주현이의 꿈 2’)으로 재현해 낸 것이다.
이렇게 간절한 마음으로 관찰하거나 기억을 되새기며 만들어낸 결과물은 그리고 지우기를 반복하거나, 필사하거나, 바늘로 꿰매거나, 어떤 사물들을 오브제로 만드는 방식의 ‘-되기’ 프로젝트에서 처음엔 모호하게 그려졌던 것이 4개의 조형 요소가 하나로 구성되고 연출되면서 각각의 소주제들이 연결성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조형·언어들이 타인의 관점에서 보고 인식하는 것에 따라 다르게 구별될 수 있지만, 어떤 작품(‘엄마의 뒷모습’, ‘선구의 노래 1’)에서는 유사한 이미지와 언어끼리 미세한 차이를 염두에 두거나 의식하게 하여 작가만의 언어를 획득하려는 의지가 드러난다. 테이블 위에 유사한 사물들로 놓여 진 완성물(<풍경-되기>의 오브제 입체 풍경)은 유사한 이미지들 사이에서 새로운 종류의 사물로 다시 태어나는 ‘오브제의 축적’의 원리와도 같이 그녀가 숱하게 체험한 ‘에피소드의 축적’으로 이루어진다. 일견 복잡하게 구성되어 보이기도 하지만, 그 축적된 오브제는 작가가 겪어온 일상의 미세한 요소를 사물에 가탁하여 자잘한 얘깃거리로 만들어 낸 것이다.
작가에게 내재한 욕망의 흐름은 외부 및 내부와의 관계에서 피력된 사물, 풍경, 사건, 인물 등의 이미지로서 동일한 역할로 전환될 수 있거나 없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개인의 정서와 ‘되기’라는 역할과 의지에 의해 나타나게 한다. 그러므로 박명미에겐 타인을 떠나 지극히 개인의 입장에서 연결되는 의미로서 복수의 역할을 부여하고, 이 역할은 분명히 작위적인 측면에서 모순에 가득 찬 욕망을 엿볼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욕망으로 인해 작가는 과감히 작가의 육신을 넘어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 그때의 기억과 흔적을 오랜 시간에 걸쳐 탐색하여 사색의 길로 들어섰고, 자기만의 창작으로 거듭나고 있다. 이번에 보여준 창작의 네 가지 요소들이 서로 다르지만, 작가 내면의 소소한 서사들이 집약되어 이전과는 다른 유형의 창작물로, 그토록 간절히 찾고자 했던 자기만의 언어와 회화로 자리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1. 이 음성 텍스트는 8개의 문장으로 구성되며, 이 옹아리를 기기에 입력하는 타이밍에 따라 텍스트가 변함.
2. 칼림바 연주자 봄눈별은 아기 옹알이 소리의 음과 리듬에 최대한 맞춰 자신이 즉흥적으로 연주하고 녹음했다. 이 곡의 일부를 다시 듣고 연습해서 오프닝에서 즉흥적으로 연주한다.
3. 안무가 김동일(작가 남편의 무용선생님)은 전시 오픈 전에 남편의 특징적 동작들을 자연스럽게 보고 느낀 것을 오픈 날에 봄눈별의 칼림바 연주에 맞춰 즉흥적인 움직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