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몸으로 기억하기 _ 김달가이 (SOMA 어시스턴트 큐레이터)
1. 공중에 매달린 묵직한 종이는 벽을 통해 나온 빛에 의해 고요히 발광하는 중이다. 바닥에 쓰러져 가는 작은 주검들을 끌어안듯 떠있는 네모난 어둠은 관람객에 의해 일렁인다. 벽을 통해 비집고 나온 작은 빛들은 무슨 말을 할 듯, 하지만 소리 없는 응시로, 마치 엄마 뒤에 숨은 어린아이의 눈길과 닮아있다.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걸까. 작품에 가까이 다가서면 그들은 마음 안에 가두고 있는 말을 입술 끝에 매달아 입을 반쯤 열어 놓은 채 있다. 그 열린 틈 사이로 터져 나오는 원망은 빛이 되어 전시장 이곳저곳을 떠돌고 관람자의 몸과 마음에 실려 함께 넘실댄다. 죽은 나무, 죽은 화초, 검게 흐르는 캔버스. 마치 사진에서의 스투디움(Studium) 롤랑 바르트(Roland Barthes)의 저서 『밝은 방(Camera Lucida)』에 나오는 개념으로, 일반적으로 사회에 통용되는 정보를 뜻한다. 이처럼 전시장에 감도는 평균적인 감정은 우리에게 어떠한 사건을 불러일으킬 수밖에 없다. 그 사건은 바다가 가진 포근한 어머니의 이미지를 자비 없이 갈퀴질해갔다.
빛은 직진하는 성질이 있다. 우리에게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지만 우주를 날아서 다른 별까지 도달하는 것이 빛이다. 박명미의 작품은 소리 내어 말하지도 구구절절이 쓰여 있지도 않지만 그의 마음은 우리에게 전달된다. 진도해협 깊은 바다. 그 커다란 아가리가 삼킨 300여개의 보석들. 끝까지 부르기에 목이 타들어가는 그들의 이름. 하지만 그들은 깊은 차가움 속에서도 빛나고 있다. 빛은 어쩌면 작가가 이용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이자 내향적인 그가 휘두를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을지도 모른다.
2. 작가는 자신이 낳은 회화가 자신의 품 밖으로 나갈 수 있을까, 그것이 세상과 소통의 다리가 될 수 있을까 궁금했다. 예술가로서 관객과 소통이 부족한 점을 고민하던 화가는 부산 예술레지던시 활동을 계기로 세상을 향한 퍼덕임을 시작했다. 자신만의 작업실, 캔버스, 물감을 떠나 눈길을 밖으로 돌렸다. 그의 따스한 손길은 길가의 이름 모를 풀(이하 잡초)들에게 닿았고, 그 잡초들에게 각자의 보금자리(음료수 테이크아웃컵)를 만들어 주었다. 그 잡초들은 자신들도 하나의 똑같은 목숨이란 걸 주장하듯이 값을 치루고 구입한 식물들과 섞여 동일한 조건의 비용을 받고 판매되었다. 그 과정에서 팔려 새 주인을 맞은 잡초와 작가에게 영원히 남은 잡초들로 갈라졌다. 새 주인을 맞은 잡초들은 자신의 이름, 경제적 가치, 의미 등이 담긴 '소비문서'라는 하나의 신상명세서를 만들게 된다. 그 순간 그 잡초는 값어치로 따질 수 없는 값진 어치를 가진 존재가 된다.
생텍쥐페리(Saint Exupery)의 소설 『어린왕자(The Little Prince)』 속의 어린왕자가 지구에서 수천송이의 장미를 만났을 때 '보통 사람들이 너희를 본다면 내 장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할지도 몰라. 하지만 나에게는 나의 장미꽃 한 송이가 수백 개의 다른 장미보다 훨씬 중요해' 라는 말을 한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것도 아니지만 각자에게 특별한 가치를 가진 존재가 있다. 어린왕자의 한 송이 장미처럼 소비자에게 중요한 존재로 다시 태어난 잡초는 새로운 주인과 서로를 길들이고, 팔릴 때의 모습 그대로 파라핀 속 드로잉으로 남게 된다. 파라핀 속에 봉쇄 되어있는 드로잉은 플라톤의 저서 『테아이테토스(Theaitetos)』를 떠올리게 한다. 고대의 메모장은 쓰고 지울 수 있는 밀랍판이었는데, 밀랍판에 새겨있는 기록은 알고 있지만 밀랍이 물러 지워지면 그 사실을 잊는다. 『테아이테토스』에서 소크라테스는 머릿속에 쓰이고 잊히는 기억을 밀랍판에 비유한다. 작가의 파라핀 속 드로잉은 절대 지울 수 없는 기억의 방법을 재현한 듯 보인다. 한편, 팔리지 않고 남겨져 죽은 잡초는 금색종이와 실, 금분으로 드로잉 된다. 그리고 올림픽공원 곳곳에 매주 5개씩 심고, 매주 작가 스스로 기억을 더듬어 그들을 찾아간다.
박명미의 작업을 통해 우리가 말하는 '기억한다'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무엇인가를 '당하는 것'인지 깊이 생각해보게 한다. 어떠한 일이 나를 관통하여 지나가면 그건 경험이다. 그 경험을 관통 없이 다시 겪는다면 그것은 기억이다. 이 기억(memory)은 외부의 접근으로 상기되었을 경우와 능동적으로 불러내어 내안에 새기는 경우 두 가지로 나눌 수 있으며, 아마 전자는 추억(recollection), 후자는 암기(memorization)에 가깝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더 높아지는 망각의 성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외부의 기억과 점점 멀어진다. 작가는 망각의 성보다 긴 머리를 길러 성 밖의 기억에게 늘어뜨려 주는 후자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작가는 흐려지는 기억 속에 반복적인 행위로 죽은 화초를 찾는 행동과 시간이 지날수록 희박해져가는 진도해협의 희생자를 찾는 행동이 결부되어 있음을 느꼈고, 자발적으로 경험을 반복하여 죽음을 기억(memento mori) 하고 있다. 그는 죽은 잡초를 통해서 우리가 바닷속 희생자들에게 약속한 '기억하겠습니다'를 어떻게 기억해야하는지 현시(㬎示)하고 있다.
이미 죽은 잡초와 시간을 나누는 일, 죽은 나무에게 물을 주고 초상화를 그려주는 일은 아무런 금전적 수입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자본주의의 시각에서 보면, 작가가 수행자처럼 온 몸(또는 온 마음)으로 기억하는 작업은 시간과 노동력을 낭비하는 것으로 보일 뿐이다. 머리 한구석에 자리하면 언젠가 떠오르기 마련인 일을 의무감을 가지고 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난 2년간 거대한 그리움, 아득함, 비통함 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기억하는 것 단 하나 뿐인 초라하고 부끄러운 시간 속을 걷고 있다. 쓸데없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유일한 의의를 갖게 되는 이 시간, 그가 의무감 속에 잡초로 보여주려 했던 증명은 '과연 무엇이 중요한 것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박명미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이 중요성의 전환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듯이 죽은 잡초 초상화를 금실과 금분으로 환생시킨다. 금빛 잡초는 하릴없이 여겨졌던 모든 일들의 승리를 상징하는 듯 각자의 무대에서 홀로 빛나고 있다. 또한 영원히 변색되지 않는 금처럼 그들의 아쉬운 죽음을 변치 않고 기억하겠다는 의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의 작업 동기가 되는 타르코프스키(Andrei Tarkovsky)의 영화 『희생』를 보면, 절망 속에 있던 주인공이 죽은 나무에 물을 꾸준히 주어 나무를 살린다. 같은 일을 계속하다 보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온몸으로 기적을 이루어낸다. 작가의 파라핀 속 드로잉, 금초 드로잉, 49일간의 죽은 나무 드로잉은 작가의 죽은 식물이 진심과 꾸준함으로 인해 위로와 재생을 얻길 바라는 염원이 담긴 온 몸으로 했던 기억이다.
낮은 물음 _ 강수미 (미술비평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박명미 작가는 미술, 특히 ‘회화’에 창작의 중심을 두고 현실의 삶과 사회적 사건들을 혼합 성찰해가며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쓴 ‘혼합 성찰’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만 박명미의 작업에는 적합한 용어라 생각한다. 그만큼 작가의 일상적 경험(레지던시 지역에서의 경험), 우리 사회 구체적인 사건(용산참사, 세월호참사, 강정마을 등), 회화를 탐구하는 작가 자신의 생각과 시도가 일종의 삼각 편대처럼 배치된 세 개의 다른 고리들로서 서로를 비추고(reflect) 섞이고, 또 다른 식으로 상호작용하며 작품을 이뤄내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박명미가 스스로의 작업 및 작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는 부분이 흥미롭고, 자문을 하는 비평가 입장에서 또한 주목할 점이었다. 이 젊은 작가는 매우 꾸준하고 집중적으로 작업에 임하고 있다. 또한 소마미술관의 작가 공모에서 100여 명의 작가를 제치고 선정될 정도로 외적/미술계 평가가 명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명미는 자신을 작가로서, 전문적 활동을 하는 아티스트로 정의하는 데 유보적 태도를 보인다. 이에 대해 권위적 주체로서 작가, 독점적 권리를 가진 아티스트라는 정체성이 아니라 자신의 창작 활동 및 작품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작가라는 정체성을 갖는 일에 대해 숙고해 볼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회화에 대한 박명미의 탐구 또한 사적인 차원을 벗어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동시에 사회적으로 특별한 가치를 생산하는 단계로 성장해나갈 수 있기를 기대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