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를 기다리며: 죽은 나무에 물 주기 그리고 그리기>
언제부턴가 나는 예술과 삶이 분리되어서는 안된다는 강박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죽은 나무를 보았다. 그리고 죽은 잡초와 그 죽은 나무를 옥상에 심어 두었다. 2015.12.08부터 2016.01.25까지, 49일동안 죽은 나무에 매일 물을 주고 드로잉 한 후, 사진을 찍고 영상으로 기록하였다.
이 겨울에, 그것도 뿌리가 잘려나간 죽은 나무, 혹은 죽은 잡초에게 물을 주고 드로잉 을 반복 한다는 것은 이미 ‘실패’ 라는 걸 알면서도 가는 예술가의 태도와 이어져 있 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본다.
- 「고도를 기다리며」는 사무엘 베케트의 소설 제목에서, 「죽은나무에 물 주기」는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의 한 장면에서 빌려왔다.
내 손의 붓
붓에 묻어난 물감은 어느 죽은 화가의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의 물감으로 죽은 나무를 그리고 있다.
어제보다 날씨는 따뜻해서 오래 그릴 수 있었다.
진심으로 그릴수 있을까. 진심으로, 온몸으로 그린다면,올 봄에는 저 나무가 살아 날 수 있을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이 붓을 놓지 않는 일이다.
(매일 죽은 나무 드로잉, 2016. 1월 25일, 마흔 아홉번째 마지막날에)
<Waiting for Godot: Watering a dead tree>
I am not sure when I started to obsessively think that art and life should not be separated.
I saw a dead tree. And I planted that dead tree with dead weeds on the rooftop.
I watered, drew and filmed them everyday for 49 days from December 8 2015 to January 25 2016.
I think that my act of watering and recording a dead tree having no root and dead weeds even though I am aware of my failure is parallel to an attitude of an artist.
-<Waiting for Godot> is borrowed from the title of Samuel Beckett’s novel and <Watering a dead tree> is from the scene of Andrei Tarkovsky’s film, Offret.
49th day, the brush in my hand.
The paint on the brush used to those of a dead painter. I am painting a dead tree using a dead man’s paint. I could paint a little bit longer due to warmer weather. Could I paint it with all my heart? If I paint with all my body, heart and soul, could the tree breathe life in the coming spring? The only thing I can do is not let go of this brush.